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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환의 지리산별곡 제25호 이 땅에 숨겨 놓은 천국의 정원이여
조문환 기자    2017-12-24 23:53 죄회수  10512 추천수 3 덧글수 1 English Translation Simplified Chinese Translation Japanese Translation French Translation Russian Translation 인쇄  저장  주소복사

이 땅에 숨겨 놓은 천국의 정원이여!

(왕시루봉)

 

 

오월 하순과 유월 초순의 들녘은 초여름의 날씨만큼이나 변화무쌍하다.

 

황금색 보리들이 타작되어 곡간으로 들여지고

바로 그 자리를 거대한 딱정벌레처럼 생긴 트랙터들의 거센 굉음이 검게 칠하더니

곧 바로 거미처럼 가는 발을 가진 이앙기들의 발이 연신 움직여 모내기가 시작된다.

 

그러고 나서 사나흘이 지나면 흙냄새를 맡은 모들은 땅심으로 금방 연초록에서 점점 짙어져 진한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게 된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시간은 길어야 두어 주,

황금 들녘에서 초록의 들판으로 변신하는 것은 이처럼 찰나와도 같다.

  

왕시루봉으로 올라가는 시간에도 모내기를 위해 논을 장만해 놓은 구례 토지면 구만리의 산답에는 물이 가득 담겼고

그 물위로 산이 투영되어 마치 논에 산이 내려와 장화를 신고 논을 장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거대한 캔버스 위에 산이 그려져 있는 것과도 같은 착각을 들게 만들었다.

 

이 시기만큼 들판이 철학적으로 바뀌는 때는 없지 싶다.

 

겨울철 빈 들판에서 회오리바람에 감겨 하늘로 올라가는 지푸라기들을 바라보면서 어지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만추의 계절에 허수아비와 코스모스의 어울림도 한 폭의 그림 같지만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그 절묘한 타이밍을 이용해 마른논이 무논으로 바뀌고

그 무논에서 한가롭게 먹이를 잡는 황새와

산이 무논으로 내려와 지상이 천상으로 바뀐 듯 착각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이를 두고 나는 이렇게 표현을 했었던 것이 기억에 떠오른다.

 

오월은 하늘이 내려앉는 날이다.

산이 내려 앉아 논배미를 휘젓는 날이다.

태양도 내려앉고 구름도 내려앉는 날이다.

이들이 설키고 얽혀 물을 데우고 논을 장만하는 날이다.

그래야만 한 알의 나락이 열리는 것이다.

 

오월은 어머니 몸뻬가 닳아지는 날이다.

수 천 수 만 번의 몸놀림으로

그 펑퍼짐한 몸뻬가 다 닳아야만 오월이 끝나는 것이다.

 

오월은 아버지 목이 쉬는 날이다.

허이 이놈의 소! 이랴! 이랴! 그래 잘 헌다

둘이 논에서 친구 되고 역전의 용사가 되는 것이다.

 

오월은 하늘과 산과 구름과 바람이 논배미에 내려앉아

함께 막걸리 마시는 날이다.

 

그래서 오월은 향기 나는 날이다.

 

 

왕시루봉은 지리산 주능선에서도 볼 수 있는 지리산의 작은 아우다.

노고단 아래에서 강 건너 백운산과 어깨동무하고 있는 그 당당함을 벽소령 능선에서 볼 수 있었다.

 

왕시루봉은 지리산국립공원 구역에 포함되어 있으나 정상적인 등산로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 미 개방 구역이다.

그래서 그렇겠지만 왕시루봉을 안내하는 공식적인 안내도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왕시루봉을 가는 코스는 여러 가지다.

주로 구례 토지면에서 출발하는 루트나 피아골에서, 그리고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코스도 있다.

 

그 중 토지면 파도마을을 통하여 올라가는 길을 선택했다.

올라가는 시간만 치면 두 시간 반 정도 될 듯 하다는 정보였다.

 

사실 내가 왕시루봉을 올라가고 싶은 것은 두어 가지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바로 내 발아래에서 흐르는 섬진강의 그 지루하고도 느린

그래서 더 짜릿한 물줄기를 보고자 함이고

 

하나는 겨울에 눈을 만들어 내는 그 마술의 맷돌을 찾아보고 싶음이다.

굳이 하나를 더 말하자면 봉우리가 얼마만큼 비슷하게 시루처럼 생겼는지 확인해 보고 싶음이기도 하다.

등산로는 좁디좁은 오솔길이었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외길이다.

공식적으로 공개된 등산로가 아니기 때문 인지 숲길은 고요하다 못해 정적이 감돌았다.

 

숲은 습기로 축축해 져 있었고 하늘을 가로막은 구름 때문에 음침하고 스산하였다.

오로지 다른 이들의 정보에만 의지하여 오르는 길이기 때문에 그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다.

 

등산로는 거의 한 방향으로만 올라갈 뿐이다.

경사도는 45도 쯤 될까?

가파르긴 하지만 약간 긴장되었기에 힘들다는 느낌은 갖지 못하였다.

 

등산로에 첫 발걸음을 디딜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하늘을 볼 수 없었다.

숲이 그만큼 울창했기 때문이다.

 

20분 쯤 지날 즈음부터는 원시적 숲의 모습 뿐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심어 놓은 것처럼 등산로에는 아름다운 꽃들과 풀들이 정교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늘진 숲속에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숲은 어떠하든지 나름대로 질서를 가지고 그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향기를 발하고

주변을 아름답게 가꾸는 자생력과 자생력이 있어 보인다.

 

등산로는 바위나 돌이 거의 없어 등산하는 내내 푹신한 양탄자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가파른 등산로를 걷는 시간 내내 무릎에 통증 같은 것들도 없었다.

 

그랬기에 오르는 시간 동안 즐겁지 아니할 수 없었다.

천국으로 올라가는 비밀 계단이 연상되었다.

 

그래 천국으로 가는 길목도 아마 이쯤 되겠지?”

저 위에 하늘과 맞닿는 곳에 아마 천국의 비밀 정원이 있을 거야!”

 

이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떻든 구만마을에서 왕시루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는 일종의 천국으로 향하는 비밀 계단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하늘이 밝아지고 하늘과 능선이 맞닿는 지점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늘이 뻥 뚫린 곳은 왕시루봉의 팔부 능선 쯤 되는 곳이었다.

억새풀이 아직도 초록으로 바뀌지 않아 가을 분위가 물씬 풍겨 오고

그 갈대를 사이에 두고 왕시루봉 정상이 초승달처럼 보일 듯 말 듯하였다.

 

내가 올라온 길을 뒤돌아보니 연무에 가려 아득히 산들이 겹쳐져 있고 아직 섬진강은 보이지 않는다.

 

낡고 좁은 헬기장이 반긴다.

헬기장 너머 다시 시작되는 등산로에는 왕시루봉 표지석이 반갑게 서 있다.

정상이 아닌 팔부 능선 지점에 정상 표지석이 서 있는 것은 아마 이 왕시루봉이 유일하지 않을까?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그 색다름에 흥미가 있었다.

 

 

 

잠시 휴식을 뒤로하고 다시 또 올라야 한다.

 

이제부터는 하늘을 보면서 올라가는 등산로이기에

그리고 손에 잡힐 듯 정상이 내 눈앞에 와 있기에 답답한 마음이 이내 사라졌다.

 

등산로 양측에는 철쭉 군락지다.

오월 초 중순쯤에 이곳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붉은 유화색 톤으로 물들여진 등산로와 능선이 눈에 선명하였다.

 

철쭉이나 꽃나무 뿐 아니라 등산로변에 자란 초록색 풀들도 다른 등산로나 산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작은 삼거리에서 멈칫거리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잠시 접어 두고

왼쪽으로 흐를 듯, 사라질 듯 생긴 사이 길을 선택했다.

 

오 분 쯤 걸었을까 색다른 건물들이 나타났다.

말로만 듣던 선교사 유적지들이다.

 

한국선교 초창기 선교사들이 정착하기 위해 온갖 고난 속에서도

복음 전파를 위한 노력들이 몇몇 건물들 속에 진하게 배여 있었다.

 

이들 이국적인 건물들이 있음으로 왕시루봉이 왕시루봉으로 다가왔다.

지리산이란 그런 것 아니던가?

피난민들을 품고 적에게 쫒기는 이들도 품어 주고 병든 자, 상한 자들까지 보듬어 주었던 산이 아니던가?

 

하물며 이 땅에 복음 전파를 위해 그들의 전 생애는 물론 가문과 후손까지 바쳤던 이들을 지리산이 거부했겠는가?

그 임무를 왕시루봉이 맡았다는 것에 고마움이 느껴졌다.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정상으로 향한다.

길게 자라난 풀들이 등산로를 덮었지만 오히려 내 바짓가랑이에 걸리는 풀들로 인하여 행복감이 전해 온다.

 

올라갈수록 시야가 넓어지고 드디어 저 멀리 섬진강의 꼬리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화개장터와 구례 간전면에 걸려 있는 남도대교가 강물에 어른거린다.

 

더 멀리 평사리와 하동 송림, 그 너머 강과 바다의 만남인 섬진대교,

그 아래 배알도까지 세밀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내 짐작이 맞을 것이다.

흐르되 소리 없이,

빛나되 광내지 않으며,

있으되 없는 듯,

느리되 쉼 없이 흘렀다.

 

연무와 미세 먼지에 강이 많이 흐려져 있지만 분명 내가 보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그 강이다.

 

한참을 응시했다.

섬진강을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여러 곳에서 보아 왔지만

왕시루봉은 섬진강이 섬진 강되게 하는 최적의 조망지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수고해야만 보이는 광경이기도 하고 한 눈에 지리산과 남해 바다까지 넣을 수 있는 지리적 위치도 그렇다.

 

눈이 올 때를 연상해 보았다.

노을이 강물에서 녹아 있을 때, 먹구름이 먹물을 들여 놓았을 때, 아침 해가 떠오를 때도 …….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여 질 섬진강의 모습이 내 눈에 아른거렸다.

 

눈을 더 들어 정상을 보았다.

 

지난겨울에 간간히 눈을 뿌려 대었던 그 맷돌을 찾아보았다.

엎어 놓았을 시루도 찾아보았다.

 

천사들이 둘러 않아 맷돌을 돌려 눈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옆에는 김이 펄펄 나는 시루가 끓고 있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였다.

 

천사들이 눈을 뿌리는 왕시루봉,

그래서 그곳은 하나님이 이 땅에 숨겨 놓은 비밀 동산이었다.

왕시루봉을 오르는 좁고 긴 등산로는 천국의 비밀 동산을 오르는 계단이었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고 주여 이곳이 좋사오니 하면서 하산하기를 거부했었다.

나 또한 천국 정원에 올라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주여 이곳이 좋사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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